지인의 편지

초이를 사랑하는 사람들

초이 김양식 선생님의 서재를 정리하며...
저는 요즘 제게 맡겨진 일을 하면서, 마음 한켠이 아릿해지는 동시에, 감정의 풍경을 넓혀가는 작업들로 코가 아프고 눈이 시리고 울기도 합니다.  초이 김양식 선생님의 서재를 정리하여 문학관을 꾸미는 일, 문학관의 온라인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 입니다.  1950년대, 60년대, 70, 80, 90, 2000, 2010, 2020~  시인 김양식 선생님의 서재에는 시간이 별처럼 박히어 반짝이고 있습니다.
 
존경 받고 계신 한국의 근대, 현대 시인들의 시집들과 수많은 저서들, 책장을 넘기면 초이 선생님께 드리는 청람, 간결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글귀들, 찬란히 빛나는 필적을 목도하게 됩니다. 감격스러움에 목구멍이 울컥하고 소리를 냅니다.
 
수도 없이 많은 선생님의 책상자 들을 풀어서 창고로 갈 것인지 전시대로 갈 것인지, 진열장 안으로 들어갈 책인지 책들의 운명을 정해주는 일을 하면서 우연히 이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고3, 19세부터 20세까지 ‘선사상’이라는 계간지를 발행하는 잡지사에서 납활자를 기계화 하여 활판 인쇄를 하는 일로서 자음과 모음이 따로 있는 수동 타자기, 청타를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잡지의 편집일과 원고 타이프를 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수도 없이 쌓인 원고들을 읽어야 했는데 기억을 빌리자면 주로 우파니샤드 경전, 라즈니쉬, 구르니예프, 크리슈나무르티, 칼릴지브란, 노자, 장자 등과 불교 관련의 선사상에 관한  글들, 해석, 번역서 등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까맣게 잊고 살았고, 수십년이 지난 현재 열아홉 스무살의 기억,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해도 순수했던 그 시절의 서랍을 여는 뇌 근육 만큼은 싱싱할 것만 같습니다.  촘촘히 박혀있는 지식의 나사를 빼어내는 듯 초이선생님의 서재를 정리하며 읽게 되는 글들이 스무살에 몰두했던 정신계의 글들을 소환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신비한 느낌의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초이 선생님과 당시의 문인들은 펜과 종이의 시대에도 그토록 부지런히 진한 역사의 철로길을 달리며 쓸개즙이 베어 나오는 듯한 잉크로 쓰디 쓴 시어들로 조국의 역사를 쓰다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비트의 시대, 아니 양자의 시대가 도래하여 초단위로 안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요즘,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를 묻게 하십니다.
 
꼼꼼히 밑줄 친 타고르의 글귀에 당신의 마음을 얹어 촘촘히 써 놓으신 작은 글씨들,  시상이 선생님을 부를 때마다 영수증, 고지서 등 손에 잡히는 종이에 지나가는 시어를 놓치지 않으시려고 초서 처럼 적어 놓은 글귀들, 하얀 종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빽빽한 습작들. 종이와 펜의 시대에 그토록 절절히 마음을 바쳐 시대의 아픔을 걱정한 사색의 흔적과 서한들을 보면서 저는 그 낡은 종이들이 소중하고 소중해서 두 손으로 색바랜 종이, 서책을 감싸 안고 한참 동안을 가슴에 대어 봅니다.
 
당신은 처절하고 거친 시대의 강을 건너시면서 격류 속에서 흐느낌을, 아픈 감정과 슬픔을 격조있게 남기셨습니다. 전쟁과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은 포대기로 지친 삶을 등에 업고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詩語들을 닦으셨습니다.
 
감정을 차고 올라오는 뿔들은 잘라내어 깊은 호수 속에 가라 앉혔다가 고요한 숲 속 같은 그 깊은 호수로 담담히 걸어 들어가 건져내어 오셨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제가 초이선생님 삶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특별하다 생각되는 인연의 끈을 꼭 쥐고 선생님의 흔적들이 생명력을 갖도록 선생님의 단상, 일기, 책갈피 사이에 꽂아두신 시대의 시어들을 줍고 닦고 모아 보겠습니다.
 

윤예숙

초이 김양식 기념문집- 밝은 빛 받는 아담한 돌탑처럼 - 유경환(劉庚換)

언젠가 퍽 오래된 지방 나들이었습니다. 경남 밀양에서 아랑제(祭)가 민속제로 부활 되는 행사에, 우리는 우연히 동행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간 버스에 몸을 싣고 요즘 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려 우리는 밀양에 닿았고, 닿고 보니 일행 가운데 초이 김양식 시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초이 선생에게 계속 눈길이 가게 된 것은, 모윤숙 선생을 깎듯이 모시는 그 몸가짐이 유별나게 돋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표충사에 가보는 기회가 마련되었는데, 그 길에서도 초이선생은 모여사를 극진하게 모셨고 모시는 몸가짐에 정성이 베어나왔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초이 생의 속마음에 박수를 아낌없이 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초이선생은 인도문화에 남다른 눈과 마음과 그리고 정성을 지닌 분입니다. 언론인 생활을 하는 동안 초이선생의 시문학 작품보다 오히려 인도문화에 대한 식견에 더 놀라곤 하였습니다.  아직 민간외교라는 채널이 열려지지 아니하였을 때, 초이선생은 인도를 민간외교의 상대국으로 정하고, 그토록 열심히 남들이 감탄하며 부러워하도록, 인도 문화에 심취하면서 인도 문화를 소개하는데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초이선생의 이런 모습은, 언론인의 눈에 아름답고 대견스럽게 비쳤으며, 가능한 한 하시는 일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습니다.

밀양 표충사에 이르는 한적한 길에 긴 그림자를 끌고 여류 몇 분이 함께 걷던 그 뒷모습은, 그곳이 밀양이었기에 더욱 그윽하게 보였는지, 하여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회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초이선생의 시작품인 「정음후사를 꺼내 펴 들고, 시행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 소리는 초이선생의 귀밑머리를 흔들고 갑니다. 아마도 한 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철학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 그의 식견의 두터움에서 일어나는 향기 때문에, 적잖은 시인들이 초이선생을 아끼는 듯 싶습니다.

초이선생이 해온 일과 해놓은 업적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돋보일 사랑이 아담한 돌탑으로 밝은 빛을 받게 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속마음이 나이테처럼 돌탑 안에 감돌아, 밝은 빛만 비치는 아담한 돌탑으로 초이선생의 모습이 후학에 의해 기려지기를 또한 바랍니다. 

유경환 : 1936.11.23~2007.6.29 강릉 출생, 호는 솔내, 한국의 아동문학가, 시인, 언론학박사   /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 사상계 편집부장, 조선일보논설위원, 문화일보논설주간 역임.

 

 

삶의 발전적 형태를 지향해야 할때 - 김광림

삶의 발전적 형태를 지향해야 할때

 初荑시인이 古稀를 맞았단다. 점잖고 다정한 말씨에 늘 젊어뵈는 그녀라서 한창 때를 막 지난줄만 알았는데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나 싶다. 나이를 한 십년쯤 낮춰 본 모양이다. 아니면 십년전에 만난 모습 그대로 이어서 인식에 착오가 생긴 것도 같다.

 소시적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인생은 60>이란 고정관념이 젊은 기를 잃지 않는 나이를 눈을 멀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사 나는 회갑을 맞았을 때 「덤」이라는 시까지 썼으니까.

 「나이 예순이면 /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 더 살면 덤이 된다 /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 중섭(仲変)은 진작 가버렸다 / 가래 끓는 소리로 / 버티던 지훈(芝薰)도 / 쉰의 고개 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 덤을 역산(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 지친 것이 많다 /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 소월(素月)의 죽사발이나 / 이상(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 누군가 들이키다 만 / 하다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회갑을 지나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니 악착같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마음의 부담감은 얼마간 덜어진 듯 했다. 하지만 막상 고희턱까지 넘고보니 <인생 60>의 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웃나라의 고령시인들과 어울리다보니 그런 생각이 겸연적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때 나는 시의 월평가라는 빈정대는 소리까지 들으며 평필을 들었지만 60이 되면서 ‘이 나이에 월평에 손을 대다니’ 하면서 물러나 앉았다. 그 후 일본의 80대 중반의 노시인이 내가 쓴 일본시인 (丸山*)론을 일간지 (中日新聞)우러평에 다룬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도 계속해 월평에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동인체는 동인들이 60 고비에 접어들었다고 해체모임을 갖는 것을 본 일도 있지만 이건 아무래도 <인생 60>이라는 고정관념의 소산인 것만 같다. 어쩌다 명의는 빌려줘도 실무에 나서려 하지않는 몸사림도 그런 것에 속한다. 80대 중반의 노시인들이 하는 동인지 『고마(独楽)』를 받아보고 나는 부끄러웠다. 한번 시작한 일 나이와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한다는 정신 앞에 너무 나이를 앞세워 그만두기 일수인 우리들. 정작 이제부터 뭔가 해야할 나이에 이르렀다고 생각을 고쳐먹기를 마음 다짐을 하고있다.

 지금 산간벽지에 묻혀있는 건 운둔이 아니라 재기를 위한 휴식이라고 억지도 써본다. 이런 심정을 고희를 넘기면서 시 「未老年」에다 실토해 보았다.

 「元老소리 듣기 싫다고 했더니 / 이번엔 아예 / 경노표 줄 생각도 않는 역 // 어쩐지 / 베레모는 …..인체 하고 / 中折帽는 폼 재는 것만 같아 / 아무렇게나 뒤집어 쓰는 / 登山帽로 푹 백발을 누르고 나섰더니 // 未老年취급을 당해 / (그래서 수염을 길러야 한다니까 젠장 글쎄 그것만은 ….) // 몇 해 전에 만든 우대증을 / 와이셔츠에 간직한 채 / 세탁하여 / 그만 박살이 나버려 // 재발급 없이 / 고개 숙이며 다니다가 / 간혹 의아심을 자아내기도 / 애초엔 / 나의 老年을 알아봐주지 않는다고 / 짜증도 났지만 / 슬며시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어 / 敬老받을 처지가 아니라는걸 / 얼마나 반갑고 고마워 해야할 일임을 / 문득 깨달아 // 그래도 공짜는 누려야겠기에 / 마지못해 주민등록증을 내밀어 / 끝내 늙음을 확인 받았지만 // 진정 아리송한 나이로다 / 아니다 / 아직 얼굴이 뻔뻔스러운거다 / 아니다 / 그런 처지의 인생이 돼가고 있는거다

 이 시에서 분명 나는 어거지를 쓰고 있는 셈이다. 시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사전을 뒤지면 <未成年>은 있어도 <未老年>은 없다. 하지만 한자로 써놓고 보니 그런대로 의미는 통한다. 아직 노인이 아니라는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未成年 출입금지 구역이 있듯이 未老年 정체금지 구역도 설치해야 할 판이다. 기피, 도피, 포기, 단념, 운둔 따위 그런 정체현상 말이다. 이제 <인생 60>은 물 건너갔다. <인생 70>으로 <덤>을 운운할게 아니라 “죽음을 삶의 발전적 형태”로 본 R.M.릴케의 말마따나 우리 이제 70부터 삶의 발전적 형태를 지향하여 새로 시작하는 마음가짐이고 싶다.

김광림(金光林) 1929년 한남 원산 출생, 관련인물 :화가 이중섭, 1972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생동한 역사 교과서 - 김학천

1997년 3월 타이베이에서 <김양식시선 金良植詩選>을 중문으로 번역 출판한 뒤를 이어 금년 가을 나는 또 베이징(北京)에서 김양식선생님의 신작 <은장도여, 은장도여>를 중문으로 번역 출판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김양식 선생님께서 이번에 중문으로 최근작 장편 서사시 <은장도여, 은장도여>를 중국에서 번역 출판한 것은 봄날의 문학 창작 생애에서, 어쩌면 만년의 전반 생활에서 한 차례 굉장히 멋진 거동으로 보여진다.

김양식 선생님은 고희(古稀)라는 70세에가 넘은 분이지만 그 우아하고 소양 있는 풍채는 여전하며 또 장편 서사시라는 묵직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994 년 5월 나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김양식 선생님을 만나 뵈었을 때 벌써 선생님의 넘쳐 나는 정력과 불타오르는 詩적 정열에 감동 되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 후 나는 한국에서나 중국에서 매번 김양식 선생님을 볼 때마다 그 분의 깊은 인정과 詩情을 느껴 볼 수 있었다.

김양식 선생님께서 나에게 <<은장도여, 은장도여>의 두툼한 원고를 넘겨줄 때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 장편 서사시를 쓰셨는가 물었더니 그 분의 답은 더없이 간단하고도 명료하였다.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서 이지요 >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는 선생님의 엄숙한 사학관(史學觀)과 웅숭 깊은 민족애와 정에 다시 한번 감동 받았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비단 현실을 관심하고 생활에 적극 참여 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는 역사를 통하여 미래를 재조명 하여야 하고 양심 있는 시인으로서는 시시각각 자기의 명운을 자각적으로 민족과 나라의 맥박 속에 응결 시켜야 하며 그 슬픔을 슬픔으로 하고 그 기쁨을 기쁨으로 하여야 하며 호흡을 같이 하고 명운을 같이 하여야 한다. 이것은 아마 내가 김양식 선생님의 이 장편 서사시를 번역 하는 가운데서 얻은 소중한 체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살았던 고국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장편 서사시의 번역을 통하여 임진왜란이 무엇이며 정유재란이 또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中. 韓 두나라 간의 밀 접한 친선 관계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역사는 거울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앞날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김양식 선생님의 이 장편 서사시가 오늘 중국에서 출판하게 됨은 우리에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생동한 역사교과서를 마련해 준 것이 틀림없다.

이 기회를 빌어 김양식 선생님께서 내내 건강하시고 장수하시기를 삼가 기원한다.


초이서울대학교 장학금 수상자- 정의균의 편지

안녕하십니까 채호석 장학금을 수여 받게 된 전기정보공학부 17학번 정의균이라고  합니다. 

2학년 2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쉬고 있을때쯤 장학금 수여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저희부모님과 많은 친인척분들이 축하의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후오 금전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사치를 부리는 등의 경험없이 큰 흥미없이 학교생활을 했던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더 많은 금전적 요구를 할 수도 없는 터라 속으로만 마음 태우며 아르바이트등을 하며 전전긍긍 하던 때도 많았습니다. 전번 학기까지만 해도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다보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이번 학기만은 의미 있게 지내보자는 생각으로 교수님의 강의에 더 집중하기로 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새로운 전공을 공부하면서 이해하고 응용해 나가는 과정의 흥미가 배가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번 학기 성적과 같이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게 되었고,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김양식 관장님께서 기부해주신 뜻깊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학업의 즐거움을 몸소 느끼고 전념하여 좋은 성적을 받는 모습을 보여드림으로써 장학금을 기부해주신 관장님께 부끄럽기 않도록 공부하겠습니다.

비록 다음학기는 군 복무로 인해 학업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지만 복학후에도 열심히 하는 학생 정의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주변이 부족하고 글쓰는 능력이 많지않아 중구난방한 편지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관장님께 감사하는 마음만큼은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장학금 기부 감사드립니다. 

김양식 선생님 칠순에 부쳐 - 양성옥(梁星玉) 서양화가

저는 49세의 나이에 4전5기로 서양화가 대학원을 진학하여 2000년 1월 16일 졸업을 했다. 지금은 열심히 작가의 생활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무수히 선생님께 인생 상담을 했다. 선생님은 8년 전 문학인의 동구 여행에서 만난 것이 우연한 만남이 되어 지금까지 인생의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다. 어떨 때는 엄마처럼 어떨 때는 큰 언니처럼 40이 넘으면서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 지의 고민이 시작되면서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한 것이 선생님을 만난 후 여자의 삶, 여자의 능력, 여자의 자아 발견 등으로 표출되었다. 여사의 따뜻한 얼굴, 의지 있는 풍체 다정한 말 한마디는 내가 지금 여기 서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내 목소리만 들어도 힘들어함을 아시고 자기 집에 한번 오라고 하셨다. 사람도 두지 않고 혼자 살림을 하시면서도 밤 늦게 원고를 정리하시고 낮이면 인도 문화원에 나가시면서 인도와의 교류를 하신다. 선생님도 43세의 나이에 대학원을 하셨다 한다. 어려운 우리 시대에 어떻게 견뎌나갔는지 궁금해 하곤 했다.

지금부터라도 무엇을 하여야 겠다는 결심이 스스로 생겨난 것 같다. 25세에 결혼하여 50이 된 지금 두 아들의 어머니, 한 남편의 부인, 시집 살림살이, 한 집안의 종부로서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 50부터는 내 인생이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미술 학원에도 나가며 진학을 준비했고 또 문이 열렸다. 지금은 작업을 통하여 내 자아를 찾아가려고 고심하여 결국 문학이든 그림이든 인간이 중심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이 삶을 풍요롭고 살만한 가치가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요즈음은 선생님의 그 많은 해박한 지식과 정신을 나의 작업 속에 끌어들인다.
얼마 전 젖가슴을 석고로 뜨는 작업을 통하여 선생님과 의논하여 세월, 허공, 수레바퀴 등의 명제를 찾았으며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참 좋은 것 같다, 열심히 해봐요, 라고 한 말씀에 힘이 나고 용기가 용솟음 쳤다. 새로 태어난 나의 인생에 훌륭한 스승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제 작가로서 사회에 알려지고 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50이 되기까지 한 주부로서 하루의 해가 지겨울 정도로 삶이 힘들었는데 이제 하루가 모자란다.
이 얼마나 충만한 순간을 느끼게 깨우쳐주신 스승님이신가.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보살님 같은 일상의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내 앞으로 마음 다스리기를 하고자 한다.
대나무 빗자루로 쓸고 또 쓸면서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찾는, 쓸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고 찌꺼기인 이 작업을 통해서 내 모습도 선생님같이 변하겠지 하는 꿈을 같게 한 선생님. 오래 오래 활동 하소서, 건강 하소서. 이렇게 쓸 수 있는 계기가 있어 이 마음 전합니다. 건강하시고 더욱 정진하시기를…
감사합니다.

 

collection of let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