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종 (평론가‧한국문인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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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어머니-역사의 여울과 창포꽃
- 작품해설, 서평, 시론
한국 문인협회 고문이신 평론가 김우종님께서
1990년 11월, 初荑 김양식 시인의 '아아 어머니'에 대하여
평론해 주신 글입니다
가장 소중한 이름의 이야기
김양식이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를 『월간문학』에 발표하면서 신인으로 등단한 해는 1969년이다. 같은 숙명여고 동기생이던 박완서와 함께 대학생이 되자(학교는 다름) 6•25를 만났던 김 시인은 박완서 보다 1년 먼저 등단한 셈이다. 이때 이 여류 시인과 소설가는 그 신선한 작품세계만큼이나 반가운 식구로 한국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었다.
김 시인은 그 후 거의 반세기 넘어서 2013년이 되고 팔순이 지난 원로로서 아홉 번째 시집 『아아, 어머니』를 내고 있다.
사납게 피스톤을 돌리고 연기를 뿜으며 수십 년 레일 위를 달 리던 기관차가 어느 날 종착역에 와서 머물고 고철이 되듯이 아무리 창작활동이 왕성하던 작가도 나이 80이면 대개는 붓을 놓는다. 그리고 아홉은 십진법의 아라비아 숫자로서는 마지막이니까 제9시집은 작자의 마지막 시집일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의욕과 혈기로 보면 다음의 제10시집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시인이나 수필가들은 거의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 어머니를 소
재로 한두 작품을 남겨 오고 있다. 소설가들도 비록 픽션이지만 자신의 내면 속에 그려진 어머니를 소설 속에서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단편적인 어머니상이 아니고 거의 전기적인 형태로 한 권의 시집 속에 어머니의 긴 삶을 담은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시집은 어머니의 고향과 가문의 내력 등부터 소상히 기록한 전기물은 아니다. 시집인 이상 시적 기법의 한계와 문학성 때문에 기록성은 크지 않다.
누구나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나고 어머니의 젖을 빨고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커서 넓은 세상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면 어머니만큼 소중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반세기를 시인으로 살고 이제 팔순의 고개를 넘은 시인이 마지막으로 가장 큰 목소리로 불러 보고 싶은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마지막이든 아니든, 작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다.
2. 절제의 시적 미학
그런데 그렇게 불러 보고 싶은 이름이라 해도 이 시집에서 내는 작자의 목소리는 남달리 크지는 않다.
부모나 자식에 대한 칭찬과 자랑은 아무리 큰소리라 해도 허물이 아니고 죄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집은 매우 차분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그려진 어머니상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저만치서 작자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대상이지만 작자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자라고 젖을 빨고 자랐고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거리가 거의 없다. 어머니가 아프면 작자도 아프고 어머니가 기쁘면 작자도 기쁘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어머니라는 문학적 소재는 자기 고백적 소재로써 가장 쓰기 쉬운 글이 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문학적 실패작의 가능성도 많다. 냉철 한 거리 유지에 의한 명확한 관찰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시인이 그린 어머니는 그 같은 자기중심적 감정의 남발이 없다. 그래서 더 독자에게 친근감을 준다.
누구나 돌아가신 어머니만큼 그리운 사람이 없고 그래서 그리 움은 서러움이 되고 감상적 세레나데가 되지만, 이 시집의 어머니는 차분한 감정적 절제의 시적 미학으로 과장 없이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다.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마지막으로 보낼 때는 분명히 오열 嗚咽 통곡이 이어졌을 터인데 그 장면도 <G 선상의 아리아>처럼 조용히 흐르는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내 품에 안겨 계시던 어머님을 다시 침상에 편히 눕혀 드렸다.
남편에게도 그제서야 어머님께서 끝내 운명하셨다는 말을 전했다. 가정부에게 더운물을 준비케 하여 다시금 모두 정갈하게 씻겨 드렸다. 어머니는 주무시는 듯 모습은 너무나도 편안하셨다.
나는 다시 어머니 얼굴과 손발에 평소와 같이 향기로운 화장수
를 발라 드리며 그제서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도 고우시던 우리 어머님은 이승에서의 85년간의 삶을
평상시에도 그러하셨듯이 조용히 딸의 품 안에 안겨 먼저 가신 아버님을 만나러 떠나셨다. 두 분은 오늘도 분명히 무한한 사람으로 나를 지켜 주시며 내 삶과 더불어 살고 계신 것이다. 내 가슴속에서 -.
– 「이젠 정말로 아주 가신 것인가」 중에서
노인은 대개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을 보낸다. 이처럼 어린 아기가 어머니 품에 안기듯 딸의 가슴에 안겨서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는 일은 드물다. 85년을 살고 가장 사랑했던 딸의 가슴에서 이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으니 복이 많으신 어머니다.
그리고 그처럼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사랑했던 어머니가 가슴에 안겨서 돌아가셨으니 그 슬픔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랴!
그런데 이 시에 나타나는 장면은 아름다운 그림으로써의 감동을 주는 형태다. 어머니를 조용히 침대 위에 눕히고 가족에게 알리고 얼굴과 손발에 향기로운 화장수를 발라 드리고, 고운 모습으로 먼저 떠난 남편 곁을 찾아가도록 비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런 시인의 자세는 이미 오래전부터 거의 일관된 모습이다.
이 시인은 처음부터 이렇게 삶의 희로애락을 아름다움만을 위한 절제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표현해 온 셈이다.
이것은 순수성만을 유지하는 창작인의 자세라고 봐도 될 것이다.
순수성이란 다름이 아니다. 창작인은 창작인으로서만 살아가 는 것이 순수성이다. 가정을 이루고 온갖 일을 해나가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일상이지만 그러면서도 문학 하는 행위가 오직 좋은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 이상 다른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순수성이다. 이런 순수성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다른 연예인들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가 기억해 주지 않는 문인의 책은 아무리 역작을 내놓아도 서점의 서가에 제대로 꽂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학은 순수한 문학적 가치 외에 다른 것에 의한 상품적 가치가 뒷받침해 주도록 때를 묻혀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것은 시류에 편승하고 독자의 취향을 재빠르게 따라가는 것 외에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문인으로서 문학단체의 사회적 지위를 갖는 것도 그렇다. 김 시인은 80세가 넘는 고령에 이르기까지 문단에서 특별히 단체를 대표하는 자리를 탐낸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시인으로서만 살아왔다.
이 시인은 내 뒤를 이어서 서초 문인협회 회장직을 맡은 일이 있다. 그렇지만 그 자리는 추대된 자리일 뿐이었다.
작자는 인도박물관의 책임을 맡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작자가 타고르의 문학에 심취하고 인도의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긴 세월의 결산이며 이를 미래로 물려 주기 위한 작업일 뿐, 이를 통해서 자신을 특별히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문인으로서의 순수성만을 유지하며 한결같이 자신의 문학의 세계를 유지해 온 사람도 드문 편이다.
3. 내면에 새겨진 어머니의 미인상
창작이란 선택한 소재를 통해서 자신을 투영해 나가는 작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얼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산과 들과 바람 등 모든 것이 자기를 말하는 거울인 셈이다.
『아아,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자는 유년기 기억 속의 어머니부터 작고하기까지의 어머니를 말했지만, 그 시는 작자의 얼굴이기도 하다.
『아아, 어머니』는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새벽 눈뜰 때마다> 의 21편은 유년기 작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다. 그리고 제2부 <어머니의 꿈> 18편은 그 후의 이야기이고, 제3부 <어머니 병상 옆에서〉의 20편은 어머니가 작자의 가슴에 안겨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의 모습이다.
마지막의 이 모습은 작자가 어려서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빨 다가 잠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머니가 아기가 되고 아기가 어머니가 된 이 모습은 결국 작자와 어머니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 시집은 어머니의 초상화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통해서 그러진 작자 자신의 자화상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집 한 권으로 전기적이며 서사시적 서술 형태로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은 우선 「오월 단오 창포꽃」에서 구체적인 영상을 찾아보게 된다.
추녀 끝 풍경 소리
오월 단오 五月 端午 창포꽃
흑단 같은 검은 머리
참빗질로 틀어 올린 어머님 낭자의
칠보매죽七寶梅竹 빛 고운 은비녀인 듯
칠보화접七寶花蝶 빛 고운 뒤 꽃인 듯
오색 五色 나비인 양 창포꽃 피네
물안개 여울에 창포꽃 피네
이것은 회화적 기법으로 묘사된 어머니의 모습이다. 참빗질로 들어 올린 검은 머리, 칠보 매 죽의 은비녀, 칠보 화첩의 뒤꽂이, 그리고 5월 단오의 창포꽃과 추녀 끝 풍경 소리가 어우러져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다.
여기서 어머니는 5월의 창포꽃에 비유되고 있으며 다른 자리에서는 부용꽃도 되고, 원추리꽃이나 참깨 꽃밭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런 꽃들은 장미나 모란만큼 화려하지 않다.
곱기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꽃들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이다. 부귀 권세를 누리는 특권층이라도 여인들은 대개 남성권 위주의 사회체제의 유교문화 속에서 집안에 갇혀 있는 정물 이상 크게 달라지지 않았듯이 작자의 어머니도 곱기는 하지만 정적인 마님으로서의 한국적 이미지를 풍긴다. 원추리나 참깨꽃이나 창포의 이미지들이 그렇다. 그런데 칠보매죽 장식의 은비녀와 칠보 화첩의 뒤꽂이 등 머리 장식을 보면 작자의 어머니는 남 달린 유복한 가정의 안방마님으로 살아간 여인이다. 예부터 서울의 경희궁 언저리 내수동이 작자가 태어나고 자라던 고향이고 아흔아홉 칸은 아니라도 반을 넘는 큰 집이었다면 떡장수로 자식 키우며 겨우 밥 먹고 살던 한석봉의 어머니와는 이주 다른 유행이다.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이율곡을 키운 신사임당 쪽에 더 가깝다. 다만 신사임당처럼 자식이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를 지내는 사회적 역광을 누리며 우리나라 화폐에 모자가 다 같이 등장하는 특수한 경우는 아니지만, 옛날 부유한 양반 가정의 전통 속에서 훌륭한 시인을 낳고 길러낸 것으로 보면 사임당 쪽에 더 가깝다.
한국의 많은 시인이 그려 온 어머니의 모습은 이와는 다르다. 대개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며 남편을 돕고 자식들을 키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 많은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의 고난은 너무 크다.
김 시인의 어머니는 이와는 다르지만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서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일제의 침략 전쟁 시기가 있었고 6•25가 있었다.
미군 B29 폭격기가 날아오던 태평양 전쟁 때는 그녀도 옥양목 치마를 뜯어서 몸뻬를 만들어 입고 방공 소방 훈련을 받았다. 이 모습은 고운 은비녀를 꽂은 여인이 아니고 창포나 부용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있었다.
중국을 침략하고 만주 하얼빈의 731부대를 비롯한 중국 땅
남쪽까지 생체실험의 세균전과 독가스전 연구부대를 만들어 놓고 있던 일본은 마침내 1941년 12월에 하와이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고 다음 해에는 말레이시아 반도 끝까지 일장기와 욱일승천기를 날리며 싱가포르에서 영국군 사령관의 항복을 받아 내더니 군수물자가 말리기 시작하자 우리들이 조상 대대로 보물처럼 물려받아 온 유기그릇들을 마구잡이로 탈취하기 시작했다. 김 시인의 집에도 약탈의 손이 뻗쳤다.
유기그릇은 일상적으로 쓰던 밥그릇과 수저만이 아니라 조상을 모시는 제기를 비롯한 촛대와 세숫대야 그리고 농악대의 징과 꽹과리 등도 모두 그렇게 사라졌다.
이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개벽 그리고 거의 유일했던 문예지 문장도 폐간되고, 우리말 우리글이 말살되기 시작하고 지조를 꺾게 되는 친일문학도 이때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옥양목 치마를 찢어서 몸뻬를 만들어 입고 방공훈련에까지 내몰리던 여인들은 얼마나 가슴 속에서 그 치욕과 분노와
억울함으로 눈물을 삼켰을까?
이때 약탈당한 유기그릇들은 모두 중국 땅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스마트라 전선의 일본군들을 위한 총알이 되고 대포알이 되었을 것이다.
몸뻬를 입고 훈련장에까지 내몰리던 조선의 여인 중에는 이미 남편이나 자식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보내야 했던 가정들이 있었다. 이보다 더 처절한 어머니들의 큰 슬픔과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김 시인의 어머니는 21세의 큰아들을 잃었다. 징병 징용은 아니라도 일제의 억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병사했으니 어머니의 가슴에 일평생 잊힐 수 없고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의 못이 박힌 셈이다.
그다음의 수난기는 6•25였다. 김 시인 가족도 트럭을 타고 멀
리 부산까지 내려가고 귀한 물건들을 내다 판다. 작자의 혼숫감이 담겨있던 고리짝도 여기서 함께 풀어헤쳐져 사라진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버들고리짝들이었다.
그 혼숫감들은 피난지 부산 거제리 장터에서
한 감 한 감 말없이 잘도 팔려나갔다
고리짝에 신주 모시듯 모셔 온 비단 옷감들은
한 감씩 절망의 처절한 모습으로 팔려나갔다
어머니의 구곡간장은 타들어 가고 다 녹아내리고
이젠 아예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늘 붙어 있는 목숨, 그 산 입에 풀칠해야 했다
희망도 미래도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피난민
서울에서 부산으로 쫓겨 온 춥고 배고픈 난민이었다
–「딸의 혼숫감‧Ⅱ」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딸의 혼숫감(작자의 혼숫감) 고리짝은 이미 해방 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 고리짝들은 마포나루에서 황포돛배 목선에 실려/ 황해도 연백 믿을 만한 친척 집으로 실려 나갔다.”
「딸의 혼숫감‧」 Ⅰ중에서
이렇게 해방 전부터 딸(작자)의 혼숫감을 마련한 것으로 보면 김 시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고리짝이 해방 후 6‧25에는 부산 피난지로 또다시 이송되어서 어머니의 동지로 옆을 지켜온 재봉틀과 함께 팔려나가며 해체된다. 어머니의 구곡간장이 타들어 갔다는 표현은 이처럼 정면으로 맞닥뜨린 비극적 현실 앞에서 혼숫감이고 재봉틀이고 모두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절망적인 삶의 위기였다. 그만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그런 김 시인 어머니의 모습은 수필이나 소설이 아니라는 문학적 양식의 조건도 작용해서 구체적 기록성이 강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 민족 다수가 가난과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받던 것에 비하면 김 시인의 어머니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자의 어머니는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라고 염원하며 가족과의 이별을 탄식하고 가난을 탄식하고 최소한도의 작은 소망을 간절히 빌던 다수의 민중적 삶 속의 여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나 해방 후 전쟁 시기를 살아간 모든 한국의 여인은 그 역사의 피해자이다. 작자의 어머니는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가보나 다름없던 유기그릇들을 모두 강탈당하고, 몸빼를 입고 방공훈련에 동원되고, 또 자식을 잃고서도 의연히 일어서며 그 시대를 살아갔다. 그리고 해방 후 6•25 때는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넘어 먼 부산까지 피난 가고 딸자식의 귀중한 혼숫감까지 모두 내다 팔며 먹을 것을 구해야 했지만, 그래도 의연히 고고한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꿋꿋하게 이겨낸 것 같다. 그렇게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해치고 이거 내며 80세가 넘어 긴 세월을 살다 간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어떤 경우에도 칠보매죽 및 고운 은비녀를 꽂은 한국의 여인상이다.
그리고 작자의 다른 비유에 의하면 어머니는 ‘물안개 여울에 (핀) 창포꽃’이다.
세찬 역사의 물결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여울, 거기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의연하게 살아간 어머니이기에 ‘물안개 여울에 (핀) 창포꽃‘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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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목을 여기에 넣습니다. (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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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 초이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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