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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만남, 시간 – 이영걸

初荑 김양식 선생의 주요한 시적 관심과 주제는 동서양 시에 자주 다루어지는 시간적인 삶이다. 김양식 선생이 맞이한 ‘고희(古稀)’의 기쁜 낱말도 인생의 여러 단계를 나누어 생각한 옛사람들의 감회를 담고 있다. 오랜 기간 시작(詩作)과 문화 연구에 정진하며 꾸준히 업적을 쌓으셨기에 선생이 맞이하는 고희는 더욱 기쁘고 값진 것이라 하겠다.

 필자는 김양식 선생과 마찬가지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김 선생이 세운 韓 · 印문화연구회 활동처럼 나름대로 타골의 시에 심취하고 있다. 근년에는 광화문에 있는 연구소에 초대되어 고창수 시인의 영문시 낭독도 들었으며, 그 이후에는 파키스탄 출신 여류 시인의 방한을 계기로 서초동 소재 김 시인 댁에 초대받아 융숭한 대접과 즐거운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동양적 우미(優美)와 서양적 지성 및 활동을 겸비한 김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오래 전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으며, 체재와 인쇄 면에서도 한국적인 멋을 지닌 『初荑詩集』(1974)을 받아 멋과 열정이 매력적으로 융합된 시세계에 깊이 몰입되었다.

 김양식 선생은 1999년에는 장편 서사시 『銀粧刀여, 銀粧刀여』를 상재했으며, 이듬해에는 수필집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간행하였다. 장편 서사시의 시도가 암시하듯이 김 시인의 시세계는 세월을 거쳐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을 보여준다. 김영삼 편저 『한국시대사전』(을지출판공사, 1988)에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온 시집들에서 선정한 1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321-31면 참조). 이 작품들은 1971년에서 1986년에 이르는 기간에 발표된 것이기에 관심이 지속성과 함께 기법과 문체 면의 변화를 드러낸다.

 김 시인의 지속적인 관심은 생명의 은혜, 만남의 의의, 시간의 흐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김 시인의 호(號) 初荑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붙인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는 생명의 은혜와 시간의 흐름을 다룬 회심작이다.

   먼 시절

   외롭게 흘러버린 세월이어도

   시방은 눈만 감고 흔들리고 있어라

   모두 모오두 한 아름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

   내 또 한번 죽어

   다시 풀꽃이 되어

   서럽게 숨 죽인 풀잎이 되어

   그 풀잎 위에 내가 누워

   풀꽃을 따서

   생각하면 철없던 세월이어도

   시방은 눈만 감고 흔들리고 있어라

   곱게 스미는 情이얼랑

   입 맞춰 멀리 아주 멀리 보내고

   풀꽃은 내 가슴 밀리는 슬픔이어도

   잔 물결처럼

   하늘 가득히 발돋움하고

   휘감기는 바람내를 껴안고 서서

   내 왼통 죽어 다시 풀잎이 되어

   그 풀잎 위에 내가 누워

   풀꽃을 따서─.

 이 시는 생명의 은혜를 풀꽃과 풀잎의 비유와 상황에 견주고 있으며, 작중 화자는 어린 시절에 풀밭에 누워 있던 상황을 회상한다. 그런 상황의 상징적 의미를 성인의 관점에서 생명의 은혜로 파악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의 은혜를 “모두 모오두 한 아름 풀꽃”, “풀잎”의 이미지로 개괄한다. 동시에, 생명의 근본적 은혜와 불가피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는 마음을 회고적 심회를 담은 “시방은 눈만 감고 흔들리고 있어라”의 반복으로 강조하고 있다.

셋째 연과 최종 연의 “내 또 한번 죽어”와 “내 왼통 죽어”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시켜 상정한 생명의 윤회 또는 부활을 언급한 것이다. 이 시는 그러므로 생명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라 하겠다. 생명의 애환은 시간의 불가피한 흐름과 마찬가지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생명의 조건이다. “곱게 스미는 情”은 지난 날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며 “하늘 가득히 발돋움하고 / 휘감기는 바람내를 껴안고 서서”는 풀의 이미지와 함께 제시한 생명의 가치에 대한 열렬한 긍정이다. “죽어 다시 풀잎이 되어”는 생명의 유한성을 유념하며 생명의 궁극적 부활과 지속을 염원하는 애틋한 심회를 표현한다.

 어린 시절 풀잎 위에 누워 풀꽃을 따던 일의 추억은 시간의 불가피한 흐름과 연관해 생명의 은혜와 목숨의 애환에 관한 명상으로 이어진다. 이 시에는 사람과 풀밭의 만남이 주로 다루어져 있지만 둘째 연의 “모두”는 동시대를 함께 사는 이들도 포함하는 언급이며 “悲歌,” “어느 가을날 아침,” “오라비는 살아서,” “낙엽길” 등의 작품에는 함께 사는 삶의 애환에 대한 절실한 깨달음과 표현이 있다. “오라비는 살아서”에서 시인은 돌아간 오빠를 추모하며 “오라비는 오늘도 스물하나 / 나는 이렇게 서른하고 아홉” 같은 대조와 축소법을 훌륭히 구사하며 “네 있어 내 살았네라 / 네 날 부르는 소리 있어 내 살았네라”(“悲歌”의 일부)와 “업은 이와 업힌 이가 / 같이 울고 가는 길 // 하늘로 난 / 낙엽길이다.”(“낙엽길”의 일부) 등에는 시간적인 삶과 인격적 교류에 대한 뜨거운 어조와 요약이 있다.


강남, 개포동 경남Apt에서 이영걸

이영걸 (李永傑)

만주 신경 출생으로, 호는 현봉()이다. 함경도가 고향인 부친이 만주로 이민을 가서 신경에서 출생하였고,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이 되어 서울로 귀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대구와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휴전 후, 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학으로 유학하여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1974년 『시문학』에 「눈 내린 날」, 「세인트루이스」외 2편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정신』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20여년 걸쳐 9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는데 첫 시집 『달』(1975)을 비롯하여 『귀향』(1975), 『목단강』(1977), 『이 드넓은 산하』(1978), 『조용히 떠오른 해는』(1982), 『스쳐가는 이 들판도』(1989), 『환한 세상』(1999) 등의 시집을 간행했다.

1972년 한국문학번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영걸 [李永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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